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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목욕탕에서

조회 수 403 추천 수 0 2017.10.03 23:3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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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목욕탕에서 모처럼 때를 밀려고 시작하는데, 
연세가 몹시 높은 할아버지께서 보호자도 없이 위태로운 움직임으로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척추가 구부러지고 두 손을 심하게 떠는 할아버지는 목욕의자에 앉는 동작 하나에도 한참이 걸렸는데, 
겨우 비누칠해 머리를 감으시더니 숨을 몰아쉬셨다.
바닥이 온통 돌이라 움직임이 하도 위태로워 보여 할아버지 곁에 가 귀에다 대고 혼자 오신 거냐고 큰소리로 여쭈었더니 
"막내에게 목욕 가자고 해도 누워서 꼼짝도 안 하길래 혼자 왔습니다."라고 어눌하게 말씀하셨다. 
할아버지 연세는 1919년생 99세, 막내가 72세라고 하셨다. 맙소사!

할아버지 귀에다 대고 큰소리로 때를 밀어드릴 테니 바닥에 누우시라 했다. 
처음엔 사양하셨지만, 시간이 여유로워 괜찮다고 안심하시도록 한 후 
내 손가락 두세 개 정도인, 부러질 듯 가녀린 팔을 조심스레 붙잡고 손등부터 때를 밀기 시작했다. 
노인의 몸을 뒤집거나 눕히고 앉히는 데에는 마비환자 간호를 오래 한 경험이 매우 요긴했다.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때를 밀고 비누칠로 마무리까지 다 마치고 나서야 내 몸을 씻기 시작했는데, 
내가 씻는 동안 연신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누워계셨다. 
혹 저러다 호흡곤란이라도 올까 싶어 목욕탕 쪽창을 열고는 드문드문 말을 걸어 할아버지의 생존(?)을 확인하며 씻어야 했다.

다 씻고 나서 할아버지 몸에 비누칠 한 번 더한 뒤 
부축하여 탕 밖으로 나와 평상에서 몸을 말리고 옷 입는 일까지 세심하게 도왔다. 
내게 굳이 음료수를 하나 사주고 싶다 하시며 포카리스웨트 하나를 주셨는데, 
72세인 막내아들 얘기 중에 꼭 '그 아이'라거나 '그 애'라고 표현하셨고,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아이'인 것이 난 경이로웠다.
"어르신, 다음에 다시 만나게 되면 제가 때 밀어드릴게요. 많이 잡수시고 오래오래 사셔야 합니다."라고 귀에 대고 속삭였더니 
환한 미소로 내 손을 꼭 잡으셨다. 
식물 돌보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 오늘, 할아버지를 만나 미세한 떨림을 겨우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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