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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산계급의 휴식이란 게

조회 수 939 추천 수 0 2017.11.22 07:5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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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후반 언더에서 활동했던 벗들 중 가물에 콩 나듯 연락하고 지내던 벗에게서 몇년 만에 전화가 왔다. 

7년 전 아내 쓰러졌을 때 병원에 한 번 다녀갔던 친구인데, 몇이 모여 한잔하는 중에 내 얘기가 나왔다면서 저녁에 서면으로 나오란다.


"내가 요즘 잠시라도 술 한 잔 들이켤 수 있는 정신이 아니니까 동지들끼리 옛날얘기 나누며 즐거운 시간 갖도록 하게. 못 가서 미안하네."라며 완곡하게 거절하고 끊었다. 

함께 첫새벽을 내달렸던 동지들과 벌건 얼굴로 나누는 세상의 온갖 투쟁사와 삶의 이야기가 얼마나 재미날까 싶었지만, 아내 쓰러진 후 여럿이 어울려 떠들고 취하는 걸 극구 피하며 여태 꾸역꾸역 전쟁 치르듯 살아온 게 내 일상의 전부다.


전화를 끊고 나니 꼭꼭 숨겼던 강박이 들킨 듯, 공연히 뭐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 곰팡이 가득 핀 식빵 신세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청소기를 들고 현관부터 시작해 주방, 아들 방, 딸 방, 안방, 서재까지 구석구석 밀기 시작했고, 줄줄 흐르는 땀에 나중엔 빤쮸만 걸친 채 화분이 놓인 선반과 실내 계단, 창 유리까지 반들반들하게 닦았다. 

무반주 첼로의 음률에 취해 시커먼 걸레를 몇 번이나 변기에 빨았는지...^^


며칠 전 실내로 들여놓은 화분들 중 빛 민감도에 따라 일일이 재배치까지 마치고 나니 거의 네 시간이 지난 듯한데, 이제 그만 사부작거리고 한 대 조용히 꾸지고 누워야겠다. 

드물게 폭력적으로 자고 싶을 때 흡입을 마다하고 쫄쫄 굶으며 꿈속을 헤매는, 그런 시간이 아니고는 잠시라도 몸뚱어릴 가만두질 못하는, 무산계급의 휴식이란 게 이렇듯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고 난 뒤 겨우 자작 냉커피 한 잔으로 기나긴 겨울밤을 홀로 건너는, 그저 초라하고 쓸쓸한 휴식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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