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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의 시적 성정 확인하는 <먼 저편>

조회 수 8770 추천 수 0 2011.07.08 08:24:50

Mischa Maisky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제 1악장 알레그로 모데라토, a단조



체 게바라의 시적 성정 확인하는 <먼 저편>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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꺾이지 않을 신념과 인간에 대한 긍휼(矜恤)을 가지지 않은 지도자들이 통치하는 나라는 불행하다. 외세로부터 자기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는 지도자들이 통치하는 나라는 불행하다. 그 나라에 사는 국민은 불쌍할 수밖에 없다.

오사리잡탕 같은 2002년 한국정치계. 젊은 것이나, 늙은 것들이나 자신의 이익과 손해만을 기준으로 손바닥 뒤집듯 신념을 바꾸는 국회의원들이 지도자 행세를 하는 한국은 슬픈 나라다. 우리는 불행한 백성이다. 권력이 아닌 인간을 사랑하는 지도자 한 명 없는 좀팽이들의 한국정치판.

이 처참한 상황은 슬픈 나라의 불행한 백성들에게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과테말라에서 혁명가가 되고, 쿠바에서 승리했으며, 볼리비아 정글에서 장렬히, 그야말로 장렬히 세상과 작별을 고한 '그리운 한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1928~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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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로서의 풍족한 삶을 스스로 포기하고 고난으로 가득 찬 혁명의 길을 걸었던 사람.
목숨을 건 싸움으로 얻은 권력을 넝마인양 버릴 수 있었던 사람.
관료화한 볼셰비키들이 역겨워 그 앞에서 내처 쿠바산 시가만 피워대던 사람.
아프리가 콩고의 밀림과 볼리비아 정글의 울부짖는 사자 같았던 사람.
처형자로 하여금 '죽음 앞에서 그토록 당당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라 술회하게 한 사람.
마르크스와 랭보, 포이에르 바하와 블레이크 사이를 넘나들던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던 사람.



하여,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 정부군의 흉탄에 유명을 달리한 지 35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전세계 모든 청년들의 가슴에 우상이자 영웅으로 살아 숨쉬고 있다. 위대한 인간은 죽음으로도 잊혀지지 않는 법이다.

94년 그의 유골이 쿠바로 인도된 후부터 인기를 끌기 시작했던 티셔츠. 제임스 딘과 리버 피닉스, 커트 코베인을 떠올리게 하는 희랍의 조각처럼 잘 생긴 그의 얼굴이 프린팅된 티셔츠의 인기는 8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하다. 베르사체나 아르마니처럼 유행을 타지도 않는다.

'혁명의 세기'라 지칭되는 20세기. 그 질풍노도의 시대를 가장 열정적으로 살아낸 혁명가 중의 혁명가. 그러나, 체 게바라에게선 불요불굴의 의지를 가진 혁명가의 모습만이 읽히는 건 아니다. 게바라는 10대 때부터 고대 그리스의 시와 보들레르의 표상주의에 경도됐던 문학청년이기도 했다.

그는 험난한 시에라 마에스트라산(山)에서 피델 카스트로, 오초아 등과 함께 생명을 담보로 한 게릴라전을 펼치며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니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었다. 바로 이 체 게바라의 문학적·시적 성정을 남김없이 확인할 수 있는 시집이 출판됐다. <한라산>의 작가 이산하(42)가 엮은 체 게바라 시집 <먼 저편>(문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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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등장하는 시(詩)들은 사실 '운문적 향취를 띠는 산문'에 가깝다. 자타가 공인하는 '게바라 매니아' 이산하가 체 게바라가 남긴 일기와 메모 등을 시의 형식에 맞게 일정부분 윤색도 했다. 하지만, 게바라 특유의 결단성과 과감성 그리고 낭만성은 전혀 희석되지 않은 채 독자들에게 전달된다.

"한 권의 시집으로 엮기 위해서는 의역과 재구성이 불가피했다. 그러다보니 다소 비약된 부분도 없지 않다. 그러나, 원전의 뜻을 왜곡하거나 없는 사실을 자의적으로 만들어 넣지는 않았다'는 것이 이와 관련된 이산하의 설명이다.

기실 <먼 저편>의 미덕은 '잘 쓴 시'를 만나는 것에 있지 않다. 철의 혁명가로만 알려진 체 게바라의 예술가적 감수성과 대면하는 것만으로도 이 시집의 가치는 충분하다.

그런 기꺼운 마음으로 책에 실린 시들을 읽는다. 될 수 있으면 전투적인 것보다는 서정적인 시편들을 중심으로 읽어가는 것도 <먼 저편>을 제대로 즐기는 한 방법이다. 책에 수록된 '참된 삶'이라는 5행의 짧은 시는 시가 가진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미학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북미의 백만장자가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문맹의 인디언이
되는 게 낫다
-- 위의 책 중 '참된 삶' 전문.



'나을 것 같다'가 아니고 '낫다'다. 백만장자와 문맹의 인디언을 비교함에 어떤 이유도 들이대지 않고, 단 한마디로 후자의 삶이 '낫다'고 말할 수 있는 과감성. 혁명가는 뒤를 돌아볼 틈이 없는 사람이지 않던가. 이 시는 혁명을 위한 투쟁에서 체 게바라가 어떤 태도를 보여주었는지를 짐작케 하고도 남는다.

과감성과 함께 혁명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는 또 무엇이 있을까. 앞서도 언급한 바 있는,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에게는 선천적으로 결핍된 인간에 대한 사랑과 신뢰다. 이 시 역시 단 6행의 칼날같은 문장으로 혁명가 아니, 인간의 덕목을 간명하게 설파한다.

민중에 대한 사랑
인류에 대한 사랑
정의감
그리고 인간에 대한
관대함 없이는
진정한 혁명가일 수 없다
-- 위의 책 중 '사랑' 전문.


혁명의 필요했던 시대는 20세기만이 아니었다. 착취와 억압, 불평등과 부자유가 아직도 존재한다면 혁명의 필요성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아래 인용하는 시는 2002년 현재를 사는 한국민 모두를 슬프게 한다.

문둥병에 걸린 이들과도 함께 음식을 나누고, 그들의 처참한 환경에 가없는 연민을 가지며, 그 불행을 강제하는 것들과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당당한 의지를 다졌던 체 게바라의 모습에 미군 장갑차에 깔려 억울한 죽음을 맞은 열 다섯 소녀들의 피묻은 운동화와 오만방자하고 불학무식(不學無識)한 미국의 태도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는 나약한 내 나라 정치지도자들의 비굴한 모습이 투영되기 때문이다.

...더 있다
보아야 할 것이 더 있다
산중에 쓸쓸히 서 있는 오두막
계속되는 굶주림과 수탈
벼룩...
저주받은 것들
사방에 버려진 넝마주의 아이들
허망한 꿈에 젖은 눈동자들
뼈반 앙상하게 남은 팔
영양결핍으로 불룩 튀어나온 배
그리고 아메리카...
-- 위의 책 중 '나환자촌' 부분.


 

 

 

 

 

 

 

 

 

 

 

 

 

 

<먼 저편>을 엮은 이산하 시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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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경상북도 포항에서 출생해 부산에서 성장했다. 부산 혜광고와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82년 문학동인지 <시운동>에 '존재의 놀이'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대학시절 지하신문의 제작과 인천지역 노동운동 등에 관여했고,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5년 가까이 수배자의 신분으로 살기도 했다.

87년에 발표한 장편서사시 <한라산>의 이적혐의 등으로 구속됐으며, 석방 후 10년 이상을 절필하다가 20세기의 마지막 해인 99년 시집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를 내놓으며 문단에 복귀했다.

올 봄 전국의 유명사찰을 돌아보고 쓴 기행문 <적멸보궁 가는 길>은 독자들의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으며, 현재 인권 월간지 <사람이 사람에게>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 홍성식 기자
'그리고, 아메리카...'라. 인류와 인간에 대한 변함없는 신뢰와 사랑을 가진 지도자는커녕, 민족적 자존심조차 팽개치는 정치모리배들만이 판치는 한국정치판에 몸을 담은 정치인들은 많은 시를 읽어보지 못했을테니, 이 시의 마지막 구절 '그리고 아메리카'와 '말줄임표(...)'에 내포된 은유도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그렇다면, 은유가 아닌 직설로 물어볼까?

나라와 국민을 책임지는 자리인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이회창 후보와 노무현 후보에게 동시에 묻노니, "우리는 진정 미국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코스모스같은 어린 영혼을 살해한 그들이 정말로 무죄인가? 우리는 대체 언제까지 민족적 열등감에 시달리며 살아야 하는가?"

체 게바라 시집 <먼 저편>은 정치인은 물론, 이기(利己)과 보신(保身)의 일상을 사는 우리들에게 위와 같은 가혹하고도 아픈 질문을 던지고 있다. 누가 있어 그 질문에 "아니다. 그렇지 않다"라고 답할 수 있을지.

2002/12/03 오후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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