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사람들

조회 수 6891 추천 수 0 2010.03.20 00:23:06

punggyung47.jpg


 

정태

 

 

이건 눈물이다
흙벽돌 찍어만든 담벼락을
구렁이처럼 타고 넘으며 내달리던
널 기억하는 건

 

 

이건 그리움이다
산비탈의 찌든 가난과
온 천지 뒹굴며 자랐던 내 몸에
남아 있는 이 천형처럼 찐득거리는 건

 

 

네 볼의 흉터가 보고싶다
내 이름 부르는
네 목소리가 듣고싶다

 

 

註...정태는 초량4동 산의 10번지, 유년기에 바로 뒷집에 살았던 친구이다.
언제였던가, 아버지 산소 가는 길에 우연히 그를 만나곤 숨이 가빠 아무 말도 못하고 헤어지고 말았다.
그의 볼엔 흉터가 그대로였고 날 부르는 그의 목소리도 그대로였다.
전화번호라도 적어놓을 걸, 바보처럼 그냥 헤어지고 말았다.

 

 

 


병호

 

 

무럭무럭 자라던 아이들보다
퀴퀴한 자취방에서 라면으로 끼니 떄우며
학교 벽에 조각되어 있던 믿음, 소망, 사랑을 비웃는
교사의 욕설과 몽둥이가 춤을 추던 곰팡내 나는 학교에
소풍 온 것처럼 드나들던 네가 좋았던 것은
네 작은 몸에서 내뿜는 큰 우정 때문이었다

 

 

넌 너대로 길을 가고
난 나대로 길을 떠났지만
너랑 함께 했던 그 많은 섬은 우리의 인생이었다

 

 

이제 무슨 말로 다 하겠나
초라하게 늙어가며 예배당 구석에 함께 앉은
네 평화가 고맙고 또 고맙구나

 

 

註...산비탈의 작은 중학교에서 만난, 내 몸뚱어리의 반 밖에 안되는, 작지만 속이 매우 깊은 친구이다.
나랑 함께 다녔던 남해안의 수많은 섬마다엔 우리의 우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열심히 살아온 그의 역정은 차라리 눈물겹지만, 결코 절망하지 않으며 하루하루 꿈꾸며 사는 그를 난 늘 지켜보고 있다.

 

 

 

 

영희

 

 

냄비 속 물이 끓어
자글자글한 네 언어가
밖으로 넘치고 튀어

네 아픔으로
난 언제나 눈이 시리지

 

 

네 혈관을 흐르는
사랑과 희망은 
내 것과 같은 것이어서
나도 어쩔 수 없어

 

 

네 심장 속 분노 또한 그러니
이도 우정이고 사랑일 테지 

 

 

註...이 무슨 인연인지 오래 전, 스무살인 그녀를 만났다. '
인간의 역사'를 함께 토론하며 80년대 거리의 분노를 나누었던 후배이다.
이제 사십대 중반이 된 수다쟁이 아줌마 영희.
말수가 적고 속 깊은 신랑과 사는 그녀는 날 보면 늘 '아저씨'라 하는데, 난 몸이 불편한 그녀의 아들을 가르치고 있다.

 

 

 

제주 형

 

 

형은 봉숭아꽃이야
여린 아침 햇살에 기지개 켜는
참 깨끗하고 소박한 꽃

비 오는 날 홀로 봉하마을 가서
청승맞게 울다 그 눈물로도 모자라
노고단 꼭대기까지 올라 고독한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고
펑펑 울다 돌아오는 형은 봉숭아꽃이야

 

 

그 고즈넉한 섬
낡은 경운기와 구부정한 할방이
터벅터벅 걷는 마을길을 함께 걷다가
문득 구름을 보고 웃었어
살짝 웃는 반달 같은 얼굴이 거기 있었거든

 

 

외로워도 힘껏 살아
슬픔과 기쁨의 임계점도
형의 바다에선 사색이고 꿈이듯
형의 까칠한 손등과
하얗게 바랜 머리카락도
그 아름다운 섬에선
그저 파도이고 바람인 것을 


 

註...제주가 고향인 형은 말이 없는 사람이다.
바다 건너 부산서 꾸역꾸역 살고 있지만 그는 늘 산과 바다를 동경하며 산다.
노무현 전 대통령 사후, 걸핏하면 홀로 봉하마을을 다녀오거나 산을 오른다.
너무 외로워 그는 좋은 사람이다.

 

 

 

 

Una furtiva lagrima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1 환청 코털아찌 2010-05-30 7206
50 안부 [1] 운영자 2010-05-11 9934
49 사람들 2. [2] 코털아찌 2010-04-25 7404
» 사람들 운영자 2010-03-20 6891
47 좌파 운영자 2010-03-12 7363
46 서귀포 1.2 운영자 2010-03-04 7050
45 연작/ 도덕수업 file 운영자 2010-02-01 6992
44 사랑 운영자 2010-01-23 7279
43 전쟁을 위한 기도 코털아찌 2010-01-12 7371
42 묵언(默言) 코털아찌 2009-12-24 7497
41 정화 운영자 2009-11-25 18007
40 기도 운영자 2009-11-19 7456
39 동전 / 꽃 운영자 2009-11-12 7223
38 아이 / 천사 운영자 2009-10-15 7197
37 사랑 / 산맥 / 섬, 그 純精한 바다에서 운영자 2009-10-02 7194
36 아버지 / 난 어쩌면 운영자 2009-06-02 7187
35 임이여 (고 노무현 대통령 부산시민 추모문화제에서) 코털아찌 2009-05-30 7117
34 회야강에서 운영자 2009-04-22 6898
33 보수 운영자 2009-03-15 7186
32 직무유기 운영자 2008-12-11 9673
31 할머니 운영자 2008-11-23 7283
30 사랑 9~12 운영자 2008-06-19 7089
29 사랑 6. 7, 8 운영자 2008-05-18 7228
28 사랑 4, 5 운영자 2008-04-12 7071
27 사랑 1, 2, 3 운영자 2008-03-22 9642
26 아내 7, 8 운영자 2008-02-08 8086
25 자본주의자 운영자 2008-02-08 7063
24 버림받는다는 건... 운영자 2007-12-19 7633
23 아내 3, 4, 5, 6 코털아찌 2007-10-28 7104
22 무덤 1~5 운영자 2007-10-14 7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