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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2.

조회 수 7403 추천 수 0 2010.04.25 22:08:00
코털아찌 *.254.176.5

punggyung47.jpg



6. 석호


벚꽃이 터져
강 건너 낚시꾼의 머리 위로 펄펄 날리던 날
내 마음은 네게로 달려가고 있었다

 


삭은 가슴 차마 열지 못해
몇 잔의 커피를 들이켜야 했지만
네 이름 부르기도 전에 "형님"하고
네가 먼저 내 가슴에 들어왔다

 


이념도 아닌 것이
흔해빠진 사랑도 아닌 것이
가슴에 들어오니 네 아이들도
꽃잎처럼 날아와 내 눈에 박힌다

 


꽃이 되고 나무가 되어
초록빛 강이 되어
함께 흐르자는 네가 이리도 좋은 걸

 


註...고성 어느 한적한 포구에서 만난 석호 동생은 무기력한 나에 비해 사는 게 늘 바빴다.
남해안을 휘젓고 다닌 전문 낚시꾼이었던 그를 다시 만난 건 그가 바다로부터 고향으로 돌아와 정착한 뒤였다.
이제 바다는 우리 둘에게 아련한 추억이 되고 말았건만 바다가 준 우정이 예사롭지 않아 얼마나 소중하고 조심스러운지 모른다.


 


7. 가현이 엄마


비수를 숨긴 채
잡아먹지 못해 안달하는 악마의 소굴에서
몇 안 되는 천사가 운명으로 보듬고 사는
사랑은 종신형이다

 


죽음의 문턱에서도
사랑은
오직 천사의 몫

 


고통과 싸우는 여인의 눈물
억장 무너지는 사랑
티끌만큼의 분노, 그것이
미치도록 눈물겹다

 


註...가녀린 천사인 그녀는 지금 림프절 종양이라는 병마와 싸우고 있다.
온몸에 번진 종양으로 몇 차례의 항암치료를 거치면서 몸은 더욱 쇠잔해졌지만,
꼭 그녀만큼 착한 신랑과 생떼 같은 아이들 걱정으로 가득한 그녀는 지금도 요양원과 병원을 오가고 있다.
눈이 펑펑 오던 날 밤 요양원에서 상담을 마치고 가지산 중턱을 내려오다, 꽃과 같이 향기로운 그녀의 순수한 영혼을 생각하며 눈물로 기도하였다.


 


8. 정수경 선생님


물살 가르며 지느러미 휘젓는
성질 사나운 고등어떼 수면을 튀는 날
벌떡 일어난 사량도와 구도가
바르르 떨며 캔버스에 혼절하고
밤새 덜컹이는 섬과 바다는 너무 어둡고 쓸쓸해
눈물이다 못해 그리움입니다

 


선생님의 바다가
한 움큼의 생명으로 날 스칠 때마다
40년 전의 콜라주가 되어
누군가, 얼굴도 모르는 이의 비애와 분노가
내 영혼에 덕지덕지 붙어
이 봄 버겁습니다

 


전기장판과 커피포트만 있으면
겨울바람조차 평화인 고성만 언덕배기
초라한 컨테이너 박스에 밤이 찾아오고
40년 전에 쳐두신
질긴 사랑의 거미줄에 매달려
그 하얀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의
토박(土薄)한 연민에 불이 붙습니다

 


선생님, 마당 구석의 할미꽃
송이송이 모두 피는 날이면
고독한 인생 투정하며 선생님과
펑펑 울고 싶습니다


註...사춘기의 까까머리 아이들에게 한결같은 미소로 미술을 가르치신 선생님.
단 한 번도 우리들에게 회초리를 들지 않으셨던 선생님께선 이제 칠순에 드신, 하얀 머리칼의 할아버지가 되셨다.
퇴직 후 고향 바닷가 산등성이에서 작은 꽃들과 나무와 어울려, 그 소소한 대지의 신비와 대화하며 지내시는 선생님께 존경과 사랑을 어찌 전할지 까마득하다.


 


9. 기수


애간장 타는 딸아이 얘길 할 때
칼끝의 절망과 분노만 남은 선배를 다독일 때
노래미 한 마리 꼬드기느라 해 넘는 줄 모르다
회 한 점에 막걸리 몇 잔 비우며 부처님 말씀 읊을 때
출세를 향해 내달리는 양아치들과
행복을 아무 데서나 내뱉는 이기주의자들과 다른
네 사랑을 보았네

 


모든 재화를 낙동강에 쏟아부을 때
좋은 일은 꼭 여럿이 함께하자 말할 때
건방진 자본가의 얼굴에 죽그릇 날릴 때
사람들의 냉소나 무관심과 같은
쓰레기의 가치와는 다른 네 신념을 보았네

 


목숨 걸고 싸워보지 못한 사람은
밥 먹다가도 우는 사람의 마음을 모른다네
흐르는 눈물로 베개를 적셔보지 않은 사람은
그 슬픔이 얼마나 깊은 심연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모른다네

 


그래서 난 가끔 널 위해 기도해
인간주의가 빛나는 네 삶과
그 부산물인 외로움을 위로하기 위해


註...짙은 눈썹과 총명한 눈빛, 사유와 배짱이 아름다운 그는 80년대의 암울한 기억을 공유하는 몇 안 되는 동지이자 아우이다.
문화의 변방인 부산지역에서 오랜 세월 출판인의 길을 한결같이 걷고 있는 그는 치열한 삶에 무심한 이들의 오락가락하는 행보를 가슴 뜨겁게 지켜보는 사람이다.
선택과 집중의 결과인 '낙동강, 물 흐름'은 그의 끈질긴 출판 근성과 풀뿌리 지역사회를 바라보는 그의 '촌락(村落)의 시선'이 녹아있는 대작이다.


 


10. 서정만 선생님


피투성이가 되어 임은 떠나시고
눈물의 빈소에 고갤 숙이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다
뚝뚝 떨어지는 동지들의 눈물이 서럽습니다
너무 서럽습니다

 


민중을 향한 지극한 사랑과 헌신
속이고 때리고 죽여도
분노조차 삭인 채
홀연히 임께선 자리를 지키셨습니다

 


임 계신 땅
아, 허기가 누운 골짜기
짐승들은 배고파 울지만
임이여
꽃이여
이 주린 배를
임의 향기로 채웁니다

 


註...한국전쟁의 여러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훈장까지 받으셨던 분으로 80년대 초 군부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순수한 마음으로 사회민주화 운동에 전력 다해 투신하신 어른으로 젊은 동지들에게 믿음과 존경을 한몸에 받으셨던 서정만 선생님.
80년대 부산지역 최초의 공개운동단체였던 민주시민협의회,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에서 열심히 활동하시던 중, 정치깡패로 여겨지는 괴한들로부터 심야에 테러를 당하신 후 건강을 잃으셨으나, 마지막 순간까지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흐트러짐 없이 보여주신 서정만 선생님 영전에 이 詩를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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